[Side] Battle for Flowerpots
Posted 2008. 1. 9. 00:52“죄송합니다만 리페레인 경.” “음? 아 - 카론 경.” 정원 산책을 마치고 막 기숙사로 들어서던 리페레인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짙은 푸른 머리카락을 내려묶은 크루세이더, 카론 스펜타에게는 입단식이 있던 날 저녁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카론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게 리페레인에겐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혹시 오늘 나가실 일 있으십니까?” “…에? 네. 잠깐 시장 쪽이라던가, 들를 일이 있어서 잠시 후에 나갈까 하지만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라고 묻자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말을 꺼낸다. 살짝 난처한 기색이 섞여있긴 하지만. …음? “괜찮으시다면 이걸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 원래라면 제가 가야 하지만, 단장님이 방금 급한 일을 맡기셔서 말입니다.” 그제야 카론의 손에 시선이 간다. 봉투 하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윤곽으로 봐서는 책.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카론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들었다가 응당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 하며 묻는다. “누구한테 전해드리면 되나요?” “아, 근위 기사단의 자이헬 데 미하람 그란디스트 경에게 전해주시면 됩니다.” “에? 근위 기사단…의 자이헬…경이죠?” 아무래도 이름이 어려운 듯 두 어 번 입 안에서 우물거리다가, 곧 그냥 이름만을 기억하고 만다. 카론은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도 같이 전해주시겠습니까?’라고 덧붙인 말에 끄덕이자 카론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해 보이고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라고 한 뒤 급히 몸을 돌렸다. 어지간히도 급한 용무였던 모양이다. “근위기사단…이면 황궁 안이었지?”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호기심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이 조금 섞인 채 카론에게 건네받았던 봉투를 슬쩍 열어 책을 확인해 보았던 리페레인이 ‘풉.’하고 웃었다. Battle for Flowerpots
황궁 안에서 근위기사단의 건물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볼까 생각했다가 이렇게 된 거 좀 헤매보자, 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걷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황궁에 신성 기사단원이 돌아다니는 것은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무슨 일이신가요?’라고 묻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아, 근위 기사단에 잠깐 일이 있어서요.’라고 말하자 친절히 근위기사단의 기숙사 건물까지 안내해 주는 바람에 모처럼의 황궁 탐험도 무산되어 버렸다. “이래서….” 이래서 반사신경이란 건 무서운 거다. 응응, 그렇고말고. 좀처럼 없는 기회를 놓쳐버린 안타까움을 곱씹던 리페레인은 곧 이어 떠오른 사실에 천천히 웃었다. 아 - 그래, 그 자이헬 경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찾아보면서 기숙사를 탐험할 기회도 있을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총총, 근위 기사단의 기숙사 건물 쪽으로 발을 옮기는데. “야, 너, 너, 너!!!!!!!!” …기품 넘치는 황궁에 어울리지 않는 비명인지 고함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움찔, 했다가 그 소리가 들린 쪽으로 살금살금 발뒤꿈치를 세우고 다가가자, 정원수 너머에서 한숨 섞인 반응이 들려왔다. “거 참, 선배.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더 그렇지!! 네 녀석은 학습능력이 없는 거냐?! 우리 여리여리한 실비아가…실비아가!!!”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라면서 상대의 멱살을 낚아채는 사람은 녹색 머리카락에…붉은 빛의 단복을 보아하니 근위 기사단원이다.(하긴 여기에 근위 기사단원이 아닌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리고 멱살이 잡힌 채 한숨 반 짜증 반의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금발의 청년도 역시 같은 빛의 단복. 아니, 하긴 뭐 ‘선배’라고 불렀으니 저 사람도 근위 기사단원인 건 맞겠지만. “저렇게 사정없이 뚝, 하고! 아아아아악!!!” “…아, 거 참 귀 따갑다니…….” “자이헬 너 이 자식!!! 지금 네 귀가 문제냐, 우리 실비아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짤짤짤짤. …흔들리는 사람은 상당히 머리가 아파 보인다.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행동 치고는 과격…하게 보이기도 한다. 왠만하면야 그냥 지나가겠지만, 방금 전 초록머리의 청년이 불렀던 이름은 리페레인이 찾던 바로 그 사람 아닌가. 다시 살그머니 발끝으로 살금살금 그 쪽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실랑이에 심취한 모양인지 리페레인의 기척에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찾는 저 ‘실비아’는 대체 누구지? “네가 그렇게 험한 손으로 우리 여린 실비아를 만지니까! 이제 얼마 뒤면 새초롬한 꽃을 피울 우리 귀여운 실비아가!!!!” “…그냥 줄기가 부러진 것뿐이잖아!” “그냥 줄기가 부러져?! 니가 그 줄기 붙일 거냐, 붙일 거냐고!!” “아, 진짜 시끄럽네!! 뿌리만 살려두면 어차피 다시 살아나는 거 아니냐고!!” “뭐가 어쩌고 어째? 네가 우리 가녀린 실비아에 대해 뭘 알아! 네 녀석하고는 달라서 우리 실비아는 조금 세게 부는 바람에도 쉽사리 꺾일지도 모르는 가녀린 아이라고! 아무데나 집어 던져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잡초 같은 네 녀석하곤 다르다고! 어쩔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야, 네 녀석 손에 피멍이 든 사랑스런 아이들이 대체 몇 명…….” …아, 그러니까 그 ‘실비아’라는 게 저건가. 리페레인의 시선이 한 쪽에 조로로 늘어선 화분 중 하나에 향했다. 줄기가 말 그대로 똑, 꺾여 휘어져 있는 꽃. 망울이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번 일만 없었더라면 며칠 뒤에 꽃을 피웠겠지. 슬슬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화분 쪽으로 다가가 꺾인 줄기를 살짝 들어본다. …음, 회생의 여지없음, 인가. 가만히 손을 모아 화분의 명복을 빌어준 뒤, 근위 기사단의 두 사람을 보자……. “그렇게 화분이 좋으면 화분 끌어안고 동생하고 같이 살던가! 이 시스콤아!” “누군 안 그러고 싶어 안 그러는 줄 아냐! 그리고 시스콤이 뭐가 어때서! 너도 우리 시에나처럼 예쁘고 착하고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사랑스런 여동생이 있으면 안 그럴 줄 알아?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로 하라고! 괜히 고운 우리 아가들한테 화풀이 하지 말고!!” “누가 화풀이 했다는 거야! 그냥 만졌을 뿐이잖아!” …여전히 멱살 잡고 싸우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서로 잡았다는 것 정도일까. 에, 음 그러니까 저기 저 금발의 근위 기사가 분명 카론 경이 말했던 자이헬…자이헬 데 미하람 그란…데스…가 아니고 그란디스트 경 인가. 손에 든 봉투를 한 번 흘끔 보고 다시 한 번 그를 본다. 꽤나 미형의 청년이다. …근데 저런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고? 조금 상상은 안가지만 그렇게 따지면 카론에게도 이 책은 어지간히도 안 어울린다. 그래, 세상에 미남이 이런 취미를 갖고 있지 말란 법이 어딨나. 이런 취미 저런 취미 다 있는 법이지. 몸을 일으킨 다음 총총 그 쪽으로 다가간다. “저어…….” “말 나온 김에 말이지, 왜 화분 사러 갈 때마다 셀레미나는 데리고 가는 건데? 선배야말로 질투나면 질투난다고 말로 하라고 말로!” “누가 그딴 거 취향이래?” “뭐? 남의 여자한테 그딴 거라고?!” “……저기요-.” 인내심 있게 한 번 더 불러보지만 두 사람은 서로 으르렁 거리는데 심취해 있는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참자, 참자, 스펜타 님, 당신의 종은 잘 참고 있는 게 맞죠? 신성 기사단의 명예를 생각해서 잘 참고 있습니다. 네. “저-기-요.” “그래, 걔가 우리 시에나의 발끝에나 미치는 줄 알아?” “말이면 단줄 아나, 선배라고 봐줬더니!” “봐주긴 개뿔! 누가 봐줘, 봐 주긴! 그래도 후배라고 봐줬더니 이 자식이!!” …이러다 진짜 치고받는 싸움으로 번질 것 같다고 생각한 리페레인은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들!” “시끄러워!!” 그건 거의 두 사람에게서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온 합창. …뭐? “…….” 짤없이 무시당한 리페레인은 천천히 숨을 다시 한 번 들이쉬었다. …스펜타 님, 당신의 종의 죄를 용서하소서. 홱, 하고 발걸음을 돌린 리페레인은 조로로 놓여있는 화분 쪽으로 다가가서는 청년이 ‘실비아’라고 지칭했던 화분의 옆에 있는 화분을 들어서. “으악!!!!!!!” 짤없이 집어 던졌다. 그리고 날아가는 효과음을 잽싸게 캐치해 낸 청년이 자이헬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바람같이 뛰어가 슬라이딩. 간발의 차이로 청년의 손 위로 화분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정원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행이다, 마리앙쥬…….” 화분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청년이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이헬은 누군가가 화분을 집어던졌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리페레인 쪽을 바라보았다가 신성 기사단의 단복에 가볍게 의아함을 표한다. “자이헬 데 미하람 그란디스트 경이시죠?” “…예, 그렇습니다만.” 방금 전까지 멱살이 잡혀 있던 탓에 단정한 단복은 좀…많이 엉망이긴 하지만, 자이헬은 화분을 집어던져 선배의 시선을 돌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성 기사단원 쪽으로 다가갔다. “신성 기사단의 리페레인 스펜타라고 합니다. - 다름이 아니고 카론 스펜타 경께서 그란디스트 경에게 이걸 전달해 달라고 하셔서.” 책이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며 카론이 전해달라고 했던 대로 ‘그리고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덧붙이자 자이헬은 내용물이 뭔지 떠올린 듯 작게 ‘아.’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저도 겸사겸사 한 일인데요.” 그렇게 분위기 좋게 수습되…. “어떤 악마의 자식이야, 우리 마리앙쥬를 집어던진 게!” …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직 리페레인 쪽은 보지 못한 듯 청년이 화분을 끌어안고 일어나며 분연히 외친다. 그리고 그 ‘악마의 자식’소리에 리페레인의 한 쪽 눈썹 끝이 조금 치켜 올라갔다. 지금 뭐라고? “이한 선배…….” 자이헬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고, 이한이라고 불린 청년이 리페레인을 본 것과. “…누가 악마의 자식이라는 겁니까!!” 리페레인이 바닥에 놓여있던 화분 하나를 집어 올려 다시 힘껏 집어 던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을 내려놓고 몸을 던져 화분을 캐치해 낸 이한이 고개를 들자 오싹할 정도로 상큼하게 웃고 있는 소녀.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누가….”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진다. “방금 누가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셨죠?” 신성 기사단의 흰 단복과 대조적인 검은 오오라가 그녀의 등 뒤에서 피어오른다고 생각한 것은 비단 이한 뿐이 아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한은 그 분노의 화살이 돌아가 있는 대상(…)이었고, 자이헬은 방관자였다는 것 정도. “네? 대답 해 보시겠어요? 그러니까….” “이한 디 카틀레야 센실바.” 툭, 하고 지켜보고 있던 자이헬이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자이헬, 너 이 자식!’하고 이한이 힘껏 노려보지만 ‘자업 자득이예요, 선배.’라는 시선으로 받아친 자이헬은 모르는 척 고개를 홱 돌린다. “대답, 해 주시겠어요, 센실바 경?” 사람이 말을 할 땐 눈을 봐야죠? 라며 고개를 잡아 돌린 리페레인이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누가 악마의 자식이라는 거야, 진짜.” 툴툴거리며 대신전으로 돌아와 기숙사로 향하던 리페레인은 막 계단을 오르려다가 발을 딱 멈췄다. “…아, 그러고 보니 초코 케익.” 가는 김에 들러서 사올 생각이었는데! 뒤늦게 떠올렸지만 지금 가면 이미 다 팔리고 없겠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리페레인은 작게 이를 갈았다. 이게 다 신실한 신의 종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매도한 그 사람 때문이야. 다음번에 만나기만 해 봐라, 그 때는 오늘 못 산 케이크를 열배로 받아내겠어. …어째서 결론이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다짐한 리페레인은 ‘내 케이크…….’라고 중얼거리며 방이 아닌 조리실로 향했다. ================================================================================== 예~전에 받았던 선착 중 요슈아님의 선착글 겸 이한 군과의 대면글이었습니다... 이한군 화분 집어던져서 미안해요 애정합니다<</발로차/싸닥 사실 진짜 쓰면서 너무 즐겁게 쳤던 저였지....orzorzorz * 새벽커플 발동. 이한군 알랍 /앙<<
기사단을 초월(...)한 커플이 되겠습니다. /절/절(이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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