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재활 훈련 겸 쓰는 글을 모아보기.
Posted 2015. 10. 22. 11:54이건 글을 하도 안쓰니 뭔가 갑갑하기 그지없어서....... 노멀판에 쓰고 있는 거를 모아보기.
바람에 베란다 창문이 크게 흔들렸다. 부모님이 둘 다 들어오지 않아 허하기만 한 거실에 외로움을 흩어버릴 겸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한참 이른 봄태풍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계 바늘은 열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티비 앞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까만 단발의 소녀는 말끄러미, 뉴스가 끝나고 흘러나오는 광고를 보고 있다가 티비를 껐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커진 듯 느껴졌다. 새까맣게 암전된 액정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홈 버튼을 눌렀다. 초기 설정에서 바뀌지 않은 핸드폰의 배경 화면과, 그 가운데 자리잡은 메신저에 새 메세지를 알리는 표시가 떠 있었다. 2. 소녀는 손 끝으로 아이콘을 건드렸다. 회식 때문에 늦는다는 메세지 하나. 회사 직원이 급상을 당해 가봐야 하니 오늘은 못 들어 간다는 메세지 하나. 각각의 대화방을 한 번 눌러 열었다 닫은 소녀는 다시 티비의 리모콘을 잡아 전원을 켰다. 저녁 시간의 버라이어티가 방송되고 있었다. 점점 더 거세지는 바람 소리를 묻어버릴 것 처럼, 소녀는 웃음이 계속 흘러나오는 티비의 볼륨을 높였다. 그리고 거실의 불을 끄고는 제 방으로 향했다. 깜깜한 거실에 소녀의 방에서 흘러나온 빛이 잠깐 스몄다가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스러졌다. 그리고 문 틈으로 새어나오던 약간의 빛도 그대로 스러졌다.
남은 것은 거실에 울리는 티비 속 웃음소리와, 부서질 듯 흔들리는 창문의 소음 뿐이었다.
늘 있는 일이었다. 익숙했다. 모두가 모여 저녁을 먹은 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소녀는 어지간한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었다. 간단한 요리, 집안 청소, 제 옷을 다리고 손질하기, 부모님이 받아와서 방치한 난초를 돌보기, 수명이 다 해 깜박이는 형광등을 갈기. 사람은 익숙해 지는 동물이라고 했다. 처음엔 어린 딸에게 그런 것을 하게 만드는 것을 미안해 하던 부모님은, 어느 날부터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그것에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서 저녁을 먹고, 설겆이를 해 놓고, 뉴스가 끝나는 시간까지 티비를 틀어놓고 할 일을 다 끝내놓은 다음, 핸드폰에 부모님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언제나처럼 잠이 들 뿐이었다. 책상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최대 열 권, 대출 기간이 2주에 연장도 2주라 제법 넉넉한 기간동안 빌릴 수 있는 책들은 소녀가 대출해 온 뒤 이틀이면 반납되곤 했다.
어둠에 익숙해 진 눈으로 침대에 누워 무늬 없는 천장을 바라보던 소녀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한참동안 천장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언젠가 읽었던 오즈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소녀는 오즈의 마법사를 종종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그럴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도로시처럼 집과 함께 자기도 모르는 세계로 날아가 버리는 꿈을 꾸곤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로시는 캔자스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소녀는 돌아가지 않기 위한 여행을 떠난 정도였다.
소녀는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에게 가짜 심장이 주어지는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곤 했다. 원래부터 형태 없는 심장을 갖고 있던 양철 나무꾼은 제 안에 심장이 있는 것을 몰랐다. 형태가 없었으니까.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양철 나무꾼의 심장은 가짜 심장이 주어진 순간 진짜로 나타났다. 오즈가 나무꾼에게 심장을 주는 부분을 몇 번이고 읽으면서 소녀는 다른 세계로 날아간 자신에게 심장이 없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에서는 함께 있지 않은 부모님에게도 심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꿈 속의 소녀는 양철 나무꾼처럼 심장을 찾지는 않았다. 그에겐 원래 사랑할 줄 알고 그를 느낄줄 아는 심장이 있었지만, 소녀와 부모님에겐 원래부터 그런 건 없었으니까. 아니, 부모님은 몰라도 적어도 소녀 자신에겐. 없는 것을 찾아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법사는 진짜로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이날 밤도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날도 소녀는 꿈을 꾸었다. 언젠가 티비에서 본 적이 있는 흑백 영화같은 꿈이었다. 꿈에서 보이는 풍경은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소녀가 꾸는 이 꿈의 배경은 늘 같은 곳이었으니까. 전부를 기억하진 못했지만 그것만은 깨어난 후에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실이었다. 돌벽에 뚫린 구멍같은 좁은 창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집들 중 높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선을 멀찍이 던지면 낮은 산이 보였다. 아마도 봄인 것일까, 흑백의 세계에서도 거리 곳곳에 꽃이 피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꿈 속의 소녀가 움직였다. 돌로 된 나선 계단을 내려가는 발 끝이 치맛자락 틈으로 언뜻언뜻 보였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반 쯤 열린 문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이 문 밖으로 나가면 누군가가 소녀를 찾아 뛰어올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는 문을 열었다. 흑백의 세계에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소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끄럽게 창을 뒤흔들던 바람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잠들기 전 커튼을 치지 않았던 창으로 새벽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꿈의 마지막을 밝혔던 햇빛이 현실의 햇살과 겹쳐들었다. 소녀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한참동안 제 이불 위로 스멀거리며 뻗쳐오는 햇살을 바라보다가 조금 눈가를 찌푸렸다. 깨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런 옅은 불쾌함이 밀려들었다가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소녀의 손 끝에 햇살이 닿는 순간 사그러들었다.
꿈은 꿈이다.
그리고 현실은 현실이다.
아무리 달콤한 꿈을 꾼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쫓아오듯.
옅은 불쾌함을 느꼈다면 그건 그저 예정보다 일찍 깨어버린 피곤함 때문일 것이었다. 결코 꿈을 방해받아서가 아니라.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회식이었다던 어머니의 기상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일찍 나가는 게 좋겠지. 이른 아침 준비를 하는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내 꿈의 파편도 지워졌다.
열 여덟 고등학생의 일과는 누구나 거의 비슷했다. 오후까지의 수업이 다 끝나면 학원으로 가서 밤 늦게 집에 가는. 소녀가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학원에 가지 않는다는 것 뿐이었다. 학교에서도 소녀는 조용하고 제 할 일을 알아서 하는 타입이었다. 그 제 할 일에는 공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차 어릴 때 부터 혼자 책을 보며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소녀는 그 덕인지 학원에 들들 볶이지 않아도 상위권을 유지했다. 같은 반의 아이들은 시샘 반 부러움 반으로 소녀를 보곤 했다. 시샘이 지나쳐 괴롭힘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괴롭히는 쪽은 괴롭힘 당하는 쪽이 밟아서 꿈틀하는 것을 즐겨서 더더욱 그 강도를 높이는 경우가 많았다. 갓 입학했을 무렵에 소녀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그런 부류였다.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니 괴롭히면 금방 무너져서 울며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결과는 대실패로 끝났다. 책상이 만신창이가 되고 사물함에 넣어놓았던 체육복이 진흙 투성이가 되어 있었을 때, 소녀는 말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가 가까이에서 조롱하는 주모자들을 본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교실에 남은 가해자 무리가 자기들 끼리 깔깔거리며 웃고 있을 때 다시 돌아온 소녀는 제 손에 들려있던 양동이에 들어있던 대걸레를 빤 물을 가장 큰 소리로 웃고 있던 여학생의 얼굴 쪽으로 뿌려버렸다. 교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을 때, 양동이를 교실 뒤쪽에 내려놓고 제자리로 돌아온 소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한 마디만을 던졌을 뿐이었다.
"똑같이 돌려줄 수가 없었어서. 다음부턴 똑같이 돌려 줄게."
이후로도 몇 번인가 그런 시도가 있었지만 소녀는 제가 말했던 대로 행동했다. 가장 눈에 띄는 주모자에게 이전에 받은대로 돌려주는 형식으로. 그것이 반 년쯤 지속되었을 때 무너진 쪽은 먼저 시작한 쪽이었다. 지독한 년이라며, 울며 책상을 뒤엎는 것을 보던 소녀는 늘 그랬던 것 처럼 주모자의 책상을 뒤집었다. 제 분에 못 이겨 주저앉아 씩씩거리는 주모자의 바로 옆에. 콘크리트 바닥에 책상이 쾅,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제 바로 옆에서 들린 큰 소리에 질렸다는 표정으로 올려다 보는 주모자를 내려다 보며 처음 시작했던 그 날과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똑같이 돌려준다고 했잖아, 돌려줄 땐 본인에게 직접 줘야지, 라고. 그 날 이후로 괴롭힘은 끊겼고, 소녀의 이름 앞엔 '지독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윤 세나, 저 독한 년.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1학년 때 괴롭힘의 주모자는 소녀와 엇갈릴 때 마다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인간이 독해도 어쩜 저렇게 독하냐. 그 말을 들을 때 마다 소녀, 세나는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을 생각했다. 독하다는 말은 틀렸다. 세나가 그대로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이나 불합리함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을 품고 움직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심장이 없는 나무꾼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런 거였다. 똑같이 돌려주겠다는 말은 복수라는 의미같은 게 아니라, '받은 만큼 돌려주라'는 말을 실천에 옮긴 것에 불과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이든, 악의를 퍼부은 사람이든.
주변이 감정으로 요동치는 폭풍우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동안에도, 심장이 없는 소녀는 평화로웠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평화가 유일하게 흔들리는 것은 바람부는 날이면 꾸는 흑백의 꿈을 꾼 다음 뿐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꿈을 꾸고 난 다음이면 평소에는 거의 느끼지 않는 온갖 느낌들이 순간 밀려들었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아주 미미해서 세나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집에 돌아와서 여느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을 보내며 문득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를 들으면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미미한 느낌이란 건, 스스로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완전히 넘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것이어서 그에 관한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하고. 그렇게 생각했다가도 그게 얼마나 의미없고 바보같은 일인지를 생각하며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
꿈을 꾸는 날은 점점 많아졌다. 이전엔 태풍이라도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 때면 꿈을 꿨지만, 요즘은 순간 바람이 창을 흔들고 지나가는 정도여도 꿈을 꿨다. 이렇게 가다간 언젠가부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꿈을 꾸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면 도로시같지 않잖아. 세나는 그 꿈을 꾸고 깨었던 어느 날 그렇게 생각했다. 꿈은 몇 번이고 같은 부분에서 끝이 났지만, 세나는 그 꿈이 결코 같은 내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보는 풍경은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졌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매번 달랐고, 흑백의 꿈이어도 날씨가 다른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선 계단을 내려가는 시선의 끝에 보이는 옷의 무늬도, 꿈속의 자신이 하는 행동도 매일 달랐다. 꿈이니 당연히 같을 수는 없었지만, 꿈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세밀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마치 꿈에서 다른 누군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다고, 꿈 속에서 작은 창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보았던 그 날, 눈을 뜬 세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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