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 줄타기
Posted 2013. 6. 20. 00:18브리스티아 시날 하면서. 브리스티아의 영웅들 서브퀘 다 끝내서 이런 시바 존나 신나를 외치며 짧게 쓰고 싶었던 거 씀.
"이렇게 해요, 파파."
블랑 로제의 거실에 마주 앉아 있는 건 세스티나와 루드비히였다. 루드비히는 답지 않게 피곤해 보이는 안색으로 이마를 짚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반면 마주 앉아 있는 막내 딸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였다. 아이는 성장한다더니, 신대륙으로 보낸 지 3년 정도. 그 사이에 마냥 철없던 딸은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어깨에 짊어진 어른이 되어 있었다.
"파파는 마마랑 같이 본국으로 돌아가세요. 가능하다면 디트 오빠랑 엘레나 언니도."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세스?"
"지금 이 상태가 본국 높으신 분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파파 뿐만 아니라 모두가 위험해 지잖아요? 그러니까."
세스티나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빙긋 웃었다.
"파파가 돌아가서 연막을 쳐 주세요."
"...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겠어요?"
"간단해요. - 루드비히 리히트 폰 슈타인베르그는 세스티나 엘레인 폰 슈타인베르그에게서 '엘레인'의 미들 네임을 박탈하고 신대륙 분가와의 연을 끊겠다, 라고 하시면 돼요."
".... 기각."
파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걸 마주 보며 루드비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나름대로는 걱정해서 궁리해 낸 방법이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린 아이의 발상이었다. 그런 얕은 수법이 통할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세스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하지만."
"연을 끊겠다, 라고 하면 세스가 가장 신뢰하는 가신들 몇몇도 이대로 본국으로 강제 송환 당하게 됩니다. 그들도 그건 원하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되면 세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진행하는 데도 곤란해 져요. 무엇보다도."
루드비히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여왕 폐하를 향한 반기가 아니잖나요? 그리고 세스의 수중에는 본국에서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할 강력한 카드들도 존재하고 있고, 브리스티아 총독의 신뢰를 얻는다면 그들은 당신을 지원해 줄 겁니다. '절연'이라는 연막은, 꺼내기엔 너무 일러요."
베스파뇰라라면 치를 떠는 케스 키엘체에게 있어 가장 예상 외였던 것은 바이런에서 키엘체로 넘어온 개척 가문 중 하나였다. 베스파뇰라의 귀족들에게 선을 댈 때 몇 번인가 이름을 들었던 명문 귀족가, 슈타인베르그 가의 신대륙 분가. 금발의 소녀는 브리스티아의 전쟁 영웅들을 제 가문에 들인 채, 브리스티아의 땅을 밟았다.
이용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게 설령 베스파뇰라의 가장 근간에 존재하는, 절대로 왕국을 배신하지 않을 칼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전쟁 영웅들이 모두 모이기로 한 빨간 모자 주점에 잭 셜리 준위와 함께 다시 나타난 금발의 워록을 보고 케스는 속으로 약하게 당황했다. 케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냉정하고 곧은 눈동자라고, 케스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브리스티아 총독 케스 키엘체 경. 오랜만에 뵙네요."
"당신까지 같이 오실줄은 몰랐습니다만."
"제 가문 사람들이 와 있는데 제가 오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당신은 베스파뇰라의 사람 아니었습니까?"
"틀려요."
케스의 비아냥 섞인 질문에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즉답했다. 케스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는 눈가를 가볍게 좁히며 웃었다.
"당신이 말하는 '베스파뇰라의 사람'은 맹목적으로 왕국에 충성하는 이들을 말하는 거겠죠. 하지만 전 만에 하나 왕국이 제 소중한 사람들에게 칼을 겨눈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역으로 찌를 수 있어요. - 이게 '베스파뇰라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
케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그 말이 진담인지 확인하듯 그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틀리지 않군요, 라고 중얼거리자 그녀는 다시 웃었다.
레이븐과 그레이스의 수확은 컸다. 제 앞에서 태연하게 '오랜만이군요.'라며 인사를 건네는 레놀드를 상대하면서 세스티나는 가만히 머릿속에서 다른 정보들을 정리했다. 몬토로 자작의 건은 유감입니다. 저 역시도 십인 귀족의 일원에게 손을 대는 건 내키지 않았어요. 같은 베스파뇰라의 사람 아닌가요. 하지만 신대륙 역시 베스파뇰라의 땅이잖습니까? 그 땅에 사는 이들은 여왕 폐하의 국민들이고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취한 고육책이었답니다. 레놀드 감찰관이라면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서 세스티나는 빙그레 웃었다. 루드비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레놀드 감찰관이 내세울 가장 큰 명목은 '왕국을 위해서'니까요. 그렇다면 세스가 한 행동도 그렇게 포장하면 되는 거랍니다. 그들은 쉽게 세스에게 손을 댈 수 없어요. 새로운 십인 귀족이라 하더라도 국내에 적을 많이 만들고 싶진 않을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막 나가면 그에게 빌미를 제공할 뿐이니까, 표면적으론 어디까지나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세요. 빌미를 잡히지 않게.
하지만 총독부 앞에서 벌어졌던 일은 유감입니다, 레놀드 경. 세스티나는 그렇게 말하곤 가볍게 인사한 뒤 돌아섰다. 카노 키엘체, J.D. 그 둘을 레놀드의 손에서 빼내어 온다면 케스가 움직이기는 한층 쉬워지겠지. 그 결론만은 레이븐과 그레이스, 그리고 케스와 같은 생각이었다. 키엘체의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걷는 세스티나의 뒤에서 크리스틴이 흘끗, 뒤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험한 일입니다. 한동안은 앞에 나서시지 않는게."
"알고 있어. - 당분간은 그레이스와 레이븐에게 맡길 생각이야. 그 사이에 난 레놀드의 상대를 해 줘야겠지."
첩보원들이 잘 움직일 수 있게 연막 정도는 쳐 줘야 하지 않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
레지스탕스의 은신처에서 돌아온 레이븐과 그레이스는 짤막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레놀드와 손을 잡고 있는 리슐리외 부총독에게 케스, 올리비아, 그리고 블러드 네이비의 J.D가 같이 있는 것을 들켰다는 얘길 들었을 때, 세스티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훈련소에 가 봐야겠어. 레놀드가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전적으로 앞에 나서시는 건."
"지금이 아니면."
단호하게 말을 자른 세스티나가 제지하는 크리스틴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의 협력은 얻을 수 없어."
케스 키엘체가 실종되었다. 올리비아의 심중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케스의 옆에서 모든 정보를 레놀드에게 빼돌리고 있었다는 것 만은 확실했다. 총독부에 올리비아를 연금시킨 뒤, 케스의 행방을 찾는 도중 마르체티에게서 연락이 들어왔다. 여전히 붙임성 없는 편지에는 짤막하게 한 줄만이 남겨져 있었다.
- 시몬이 비공정 제어권을 요구하고 있어.
세스티나는 그 편지를 받고 미간을 찌푸렸다. 시몬은 마르체티의 약점을 쥐고 있었지만, 그걸 함부로 쓸 바보는 아니었다. 시몬이 지금 비공정의 제어권을 요구하는 건 어디까지나 케스의 '협력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심중은 뻔했다. 왕당파와의 격돌은 신대륙에서도 격화되고 있었다. 왕당파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 중 지금 가장 유력한 건 비공정이었다. 왕당파의 중심지를 궤멸 시킬 수 있는 수단이 탐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구긴 세스티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체티가 시몬을 싫어하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오기로라도 그에게 비공정 제어권을 넘겨줄 리는 없었으니까. 세스티나는 짧은 답신을 써 보냈다.
- 무시해.
시몬은 분명 좋은 협력자였다.
하지만 그의 의중대로 놀아날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세스티나 본인은 공화파를 지지하는 것도, 왕당파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정치 싸움에 휘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왕국의 썩은 부분을 왕당파가 감싸고 있는 게 진저리가 났을 뿐, 공화파가 그들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들에게도 얼마든지 등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가 믿고 지지하는 건 제 사람들 뿐이었지.
*
키엘체 연구소에서 공화파 병사들과 대치하고, 그들 중 하나에게서 시몬의 밀서를 발견했을 때 세스티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와 행동을 같이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J.D는 가만히 밀서를 바라보고 있는 세스티나를 보고 뭔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런 그를 케이시스가 제지했다.
" -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마르체티에게 가야지. 그리고 - ."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 안에서 밀서가 구겨졌다.
"시몬에게 모든 걸 들어내야겠어."
그리고 그가 자신들을 배신했다면, 그에 걸맞는 보답을 해 줘야지. 생략된 뒷 말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오슈 자유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마르체티를 대동하고 들어서는 세스티나를 보는 시몬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공화파에 있어선 잃고 싶지 않은 협력자겠지. 그의 눈동자 안에서 복잡한 계산이 오고감을 읽은 세스티나는 이 일이 그렇게까지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란 것 정도는 짐작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비공정이라는 무기를 쉽게 포기하진 않을 거란 것도. 한 번 쯤은.
"준비 해."
마르체티와 시몬이 설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세스티나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J.D는 그 감정이 억제된 목소리에 검 자루를 고쳐 잡았다. 다수의 발소리와 동시에 자신의 옆에서 이젠 어느정도 익숙해 진 마법의 열기가 느껴졌다. J.D의 손에서 폭약이 흩날렸다. 공화파 병사들을 제압하는 데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죽여도 되는 가에 대해서 J.D는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정작 가장 손속없이 마법을 날린 워록은 지독히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치 이정도 한다고 해서 시몬이 자신들을 전면적으로 적으로 돌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비공정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당신이 브리스티아에서 얻을 게 없다는 것 정돈 알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몬을 향해 그녀가 차갑게 내뱉었다.
"더 이상 당신에게 브리스티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진 않겠어. 그게 아마 케스도 바라는 일이겠지. 손을 떼고 싶으면 떼도 좋아. 하지만 더는 비공정 제어권을 요구하지도 마. 신대륙의 상공에 비공정을 띄우는 순간, 왕당파 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그토록 열렬히 주장하는 신대륙의 평화마저 죽어버릴테니까."
- 친애하는 키엘체의 주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위대한 첫 걸음을 떼었습니다.
그 동안 해가 지면 문을 걸어잠그고, 숨 죽여 살았던 시간은 끝이 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 브리스티아의 독립을 위해 목숨걸고 싸운 영웅들의 활약으로 독립에의 첫 걸음을 떼었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키엘체의 총독 케스 키엘체가 아닌, 브리스티아의 독립 투사 케스 키엘체가 될 것입니다.
3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배신자의 오명을 쓰고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브리스티아의 국민들이 베스파뇰라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브리스티아의 국민들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나 케스 키엘체를 배신자라고 욕해도 좋습니다.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해도 좋습니다.
우리 브리스티아의 국민들이 베스파뇰라로부터 독립하여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더욱 강대한 국가로 거듭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만 있다면 어떤 굴욕도 감수해 낼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떼듯 우리도 이제 한 걸음을 나아갔습니다.
베스파뇰라의 십인 귀족이었던 레놀드 장군과 블러드 네이비가 이 곳 키엘체에서 독립군에 의해 괴멸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전투에 승리했다고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 레놀드 장군을 대신할 누군가가 이 곳으로 파견될 것입니다. 총독이 바뀔지도 모릅니다.
나 케스 키엘체는 베스파뇰라의 무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 브리스티아 국민들과 이 곳 키엘체를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가 첫 걸음을 떼는 데 큰 공을 세운 브리스티아의 영웅들을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브리스티아 육군 정보장교, 그레이스 베르넬리 소위.
브리스티아 육군 특수 부대의 가르시아 힝기스 소위.
브리스티아 첩보 장교, 레이몬드 소령.
브리스티아 육군 특수 부대의 에두아르도 힝기스 대위와 약혼녀 셀바 노르떼.
브리스티아 육군 공병대, 잭 셜리 준위.
마지막으로.... 슈타인베르그 가문.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는 절대 승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Filed under : Granado Esp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