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키카사] 알지 못했던 여름의 끝
Posted 2012. 10. 8. 00:06모 님이 고 2때 멘붕하는 선배가 보고 싶다고 하셨던 그 썰에서 시작된 연성. 짧게 갈거예요 그럴거라고 시발 선배 귀여워 선배 사랑해요 쫌만 멘붕해 주세요 그리고 키카사.
4쿼터가 끝나는 부저 소리로 꿈이 늘 끝났다. 카사마츠는 식은 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이며 등 뒤며 목덜미며, 식은땀이 흥건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네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창 밖은 아직 깜깜했다. 대충 식은 땀을 닦아내려 손을 들었을 때, 그 손마저 잘게 떨리고 있는 걸 보고 카사마츠는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면, 그 장면만이 떠올랐다. 제 손에 들려 있던 공, 4쿼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10여초, 상대팀과의 점수 차이는 1점 차. 시야에 3학년 선배가 보였다. 그 쪽으로 패스를 했다. 아니, 했다고 생각했다.
손 끝에 공이 걸리는 느낌이 이상했다. 아차, 했지만 이미 공은 손에서 떠난 뒤였다. 한 번 코트 바닥에 바운드 된 공은 상대팀 선수 쪽에 조금 더 가까이 튕겨져 나갔다. 눈 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상대팀 벤치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버저비터. 4쿼터 종료를 울리는 부저와 동시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이 네트를 뒤흔들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인터하이 초전 패배 이후, 농구부는 잠시 연습 휴식기에 들어가 있었다. 인터하이 첫 시합에서 졌으니, 윈터컵을 준비할 수도 없었다. 3학년의 여름은 너무도 일찍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은 다름 아닌 카사마츠라고, 3학년도 OB도 입을 모아 그렇게 얘기했다.
시합이 끝난 다음의 대기실은 말그대로 살풍경했다. 카사마츠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긴 침묵 끝에 누군가가 툭 내뱉은 한 마디가 도화선에 불씨를 당겼다. '할 말 있으면 해 보지 그러냐.' 카사마츠는 그 차가운 한 마디에 어깨를 움츠렸다. 할 말 같은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완벽하게 제 실수였고, 그 실수만 없었더라면 이긴 시합이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코보리와 모리야마가 뭔가 말하려다가, 카사마츠의 뒷모습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라곤 한 마디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멱살을 잡혔다. '죄송하다면 다냐!! 네 녀석 때문에!!' 목소리 끝이 갈라진 비난의 목소리에, 카사마츠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눈을 내려깔았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그저 그 말 밖엔, 더는 할 말이 없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말리기는 커녕,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 비난이 쏟아졌다. 다 이긴 시합을 그딴 식으로 말아먹다니. 학교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비난을, 카사마츠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울 수도 없었다. 아니, 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울어도 되는 건 올해로 여름이 끝나버릴 선배들이지, 제가 아니니까. 눈 안쪽이 따가울 정도로 아프고, 쏟아지는 비난과 욕설에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무거웠지만 카사마츠는 꾹, 참았다. 그 일방적인 비난의 세례는 대기실에 감독이 들어오기 전까지 계속 되었고, 감독이 들어왔다가 해산이라고 하자 선배들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카사마츠를 노려보곤 거친 걸음으로 나갔다. 옆을 지나칠 때마다 한 마디씩, 비난이 들려왔다. 선배들이 전부 다 나간 다음, 1학년의 하야카와와 같은 학년의 코보리, 모리야마가 뭔가 말을 하려는 걸 카사마츠는 고개를 저어 막았다.
"미안, 먼저 가."
제대로 말을 했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코보리가 한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카사마츠의 어깨를 두드렸고, 모리야마는 뭔가 말하려는 하야카와의 입을 틀어막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대기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카사마츠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무서웠다.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믿고 의지하던 선배들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학교에 가는 것도, 체육관 쪽으로 가는 것도 두려워 진 건 그 때부터였다. 3학년들과 행여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여전히 험악한 표정부터 보였다. 카사마츠가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는 횟수가 늘었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때마다 제 안에서 조금씩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농구부 연습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매일같이 공을 손에 들고, 시간이 가는 것 조차 새까맣게 잊고 연습을 하던 자신이 신기할 정도로, 코트에 들어서는 게 무서웠다. 체육관에 한 발을 들이면 같은 2학년들에게마저 비난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 악몽도 몇 번인가 꾼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적도 있었다.
체육관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돌아서는 게 벌써 일주일 째였다. 처음엔 체육관 문 앞, 그리고 그 다음은 조금 떨어진 거리, 다음날은 조금 더. 그렇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되다가, 일주일 째에는 기어코 체육관이 보이는 곳에서 걸음이 멎었다. 멀찍이서 드리블 소리가 들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 정도였다. 서 있는 게 최선이었다.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코트에 가까이 가는 것 조차 힘들었다. 농구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귓가에서 그 날 들었던 목소리가 울렸다. 카사마츠는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시야에서 체육관이 흐릿해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세상이 한바퀴 핑 도는 기분이었다. 현기증마저 났다. 어렴풋이 보이는 체육관에서 교복 차림의 누군가가 나오는 게 보였다. 훤칠하게 키가 크다는 것 외엔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엉망이었다. 마주치면 안돼. 도망치고 싶어서 어떻게든 걸음을 떼려 했지만 땅에 발이 달라붙기라도 한 듯, 떨어지질 않았다.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시야가 핑 돌았다. 그리고 눈높이가 급격히 낮아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때, 체육관에서 나오던 인영이 멈칫 했다가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낯선 사람이었다. 다만, 카사마츠는 마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마. 그만해. 숨을 쉬는 것 조차 힘이 들어서, 떨리는 손을 올려 제 옷자락만을 꽉 움켜 쥐었다. 그리고 그 손등에 눈물이 떨어져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
키세가 눈을 떴을 때,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텅 빈 체육관에 저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분명 아침 연습을 끝내고 이상할 정도로 피곤해서 오전 수업을 땡땡이 친 다음 옥상의 그늘에서 기분좋게 자고 있었는데, 왜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체육관이었는지 의문이었다. 몽유병인가? 아니면 누가 옥상에서 자는데 체육관에 옮겨놨나? 아니, 왜 하필 체육관?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체육관에 햇빛이 비쳐들어 코트에 반사되는 것이 보였다. 낮인가?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키세는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한 번 길게 켜고, 주변을 둘러보자 공이 하나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이상하다, 아침 연습 끝나고 다 정리 했던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키세는 그리로 가서 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몇 번인가 몸을 풀 겸 움직이다가, 체육관 한 구석에 공을 내려놓고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계를 보니, 멎어있었다. 이상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두시간 정도는 땡땡이 친 거 같으니 슬슬 교실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체육관을 나선 키세는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사람을 보곤 걸음을 멈추었다.
"선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못 알아 볼 리가 없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못 알아 볼 리가. 손을 들어 부르려다, 키세는 멈칫했다. 멀리서 봐도 뭔가 이상했다. 마치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굳어 서 있는 선배. 말을 걸려고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게 보였다. 키세는 질겁하며 그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위화감을 느꼈다. 직감이었다. 키세가 아는 카사마츠보다, 조금 더 약한 것 같은. 어디가 그렇다고는 딱 잘라 말할 수 없었지만, 카사마츠의 변화엔 누구보다 민감하다고 자신하고 있던 키세였다. 머뭇거리며, 키세는 주저앉은 카사마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카사마츠 선배."
흠칫, 하고 제 손이 닿은 어깨가 발작적으로 떨렸다. 숨이 불안정했다. 다시 한 번, 카사마츠를 불러보려 했을 때,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할테니, 까."
"....에?"
"다시, 는... 코트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니까...."
그만 해 주세요. 제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쥐어짜듯 내뱉은 그 말에 키세는 직감했다.
아아, 이건 '그 때'구나. 왜 지금 제 눈 앞의 선배가 '그 때'의 선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2학년, 인터하이 첫 시합에서의 실수로 지고 말았던 그 때의.
*
제 어깨에 손이 닿았다. 카사마츠는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서웠다. 누구인지 몰라도, 다시 한 번 그 말을 할 것만 같았다. 너 때문이야. 네 녀석이 그런 바보같은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건 너야. 3학년 마지막 여름을 일찍 끝내줘서 '정말로 고맙다'. 마지막 한 마디는 그토록 믿었던 주장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내내 맴돌아서, 제 앞의 '누군가'가 하는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선배같았다. 제게 그런 말을 하던 선배들 중 하나같았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어깨에 손을 얹어줄 리도 없었지만.
죄송해요. 제 잘못이니까, 다시는 코트에 발을 들이지도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만 해 주세요.
더는 농구가 싫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그만 할 테니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울음과 두려움과 고통이 뒤섞여 제대로 숨조차 내 쉴수가 없었다. 옷자락을 쥔 손 마디가 아플 정도였지만, 그보다도 더 무서운 건 다시 한 번 그 비난을 듣는 거였다.
제법 큰 손이 옷자락을 움켜쥔 카사마츠의 손등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달래듯 겹쳐진 손. 카사마츠는 그제야 움찔, 하며 고개를 들었다.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하는 시야에 들어온 건, 낯설디 낯선 이였다. 금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에 한쪽 귀에는 파란 피어스. 어째서인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는 웃고 있었다. 어깨에 얹은 손을 들어 카사마츠의 뺨을 감싸쥔 그가 가만히 이마를 맞대었다. 어째서인지 그 체온이 닿아온 순간,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선배."
누구야, 넌. 내가 아는 후배 중엔 너 같이 상냥한 녀석은 없는데.
"선배,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해도, 전 선배를 믿으니까. 선배가 절 믿어주셨던 거 처럼."
조근조근,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해서 무서웠다.
"전, 반드시."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손등에 닿아있던 온기가 떨어지는 걸 느끼곤, 카사마츠는 저도 모르게 다급히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상대의 옷자락을 잡았다. 말을 잠깐 멈춘 그가 약하게 웃었다. 그리고 옷자락을 움켜쥔 손을 다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전 반드시, 선배 곁에 있을 거니까.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농구, 싫어하지 말아요. 그만 두지도 말아요. 코보리 선배도, 하야카와 선배도, 모리야마 선배도, 저도 선배를 믿으니까. 전력으로 선배를 받쳐드릴거고, 지켜 드릴거니까."
좋아해요, 울지 말아요, 선배. 뺨에, 이마에, 눈가에, 콧등에 몇 번이고 가벼운 키스가 쏟아졌다. 너무 울어서일까, 아니면 너무 두려워 해서였을까, 카사마츠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몸이 기울었다. 그걸 받쳐 안은 그가 카사마츠의 등을 몇 번이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믿는다고, 좋아한다고, 괜찮다고. 마치 주문처럼 몇 번이고.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그러고 보니, 근 일주일 넘게 제대로 잠도 자질 못했지.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따스해서, 카사마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카사마츠는 체육관 근처의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가가 쓰렸다. 아, 또 울어서인가. 어느새 하늘 한 쪽 구석이 노을로 물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시계를 보자 오후 여섯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바깥에서 오래도 잤네. 그렇게 생각하던 카사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문득 체육관 쪽을 보았다.
일주일 째,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곳이었다. 오늘도, 낮에까진 분명 가려다가 무서워 졌던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해 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코트가 그리웠다. 선배들이 그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어주는 사람들, 믿어주는 '후배'를 위해서. ... 후배? 하야카와인가? 카사마츠는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멈췄다. 아니, 그 녀석 말고..... 누구지.
고개를 잠깐 기울였던 카사마츠는 곧 피식 웃었다. 뭐 어때. 나중에 들어올 후배도 있을텐데. 열려있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자 코트 한 쪽에 얌전히 놓인 공이 보였다. 카사마츠는 그 공을 집어들었다. 오랜만의 감촉에 웃음이 나왔다. 문득, 뇌리에 낯선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 전 누가 뭐라고 해도 선배를 믿으니까.
선배들의 믿음을 배신한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후배의 믿음마저 배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 손을 벗어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네트를 흔드는 걸 보며, 카사마츠는 웃었다.
이런 선배로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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