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urvan][完]
[Side] For my lovely family
ashu
2008. 1. 12. 00:53
For my lovely family 대신전의 밤은 고요했다. 작은 등불을 켜 놓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소녀의 펜이 잠깐 멈추었다가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종이 위를 깃털 펜이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렸다. 사각사각, 하고. 「사랑하는 케이네스 오빠에게.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믿고 있어. 내일로 대신전에 온 지 10년 째. 슬슬 수련사제의 직급을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아. 다른 고위 사제 분들이 벌써부터 걱정이셔. 무사히 의식은 치를 수 있겠느냐, 긴장해서 문답을 잊어버리진 않겠느냐 등등. 긴장하고 있냐고 묻고 싶겠지? 오빠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아? 리페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장할 걸로 보여? ‘나는 네 실수마저도 감싸 안으니 그것은 네가 나의 가호 아래 자라난 아이이기 때문이다.’ 기억 나? 내가 늘 오빠와 엘키네스에게 읊어주었던 그 구절. 응,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기뻐. 처음 대신전에 오빠랑 아빠랑 같이 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해. 예배당에서 성가가 울리고 있던 가운데, 내가 보았던 그 분은 누구보다도 빛났고, 누구보다도 성스러웠어. 아마 성령의 현신을 지상에서 찾는다면 그 분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일 있을 의식에는 그 분이 오신다고 들었어. 물론 의식을 집전하진 않으시겠지만, 강단에 올라가면 아마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겠지……」 종이 위를 움직이던 펜이 멈추었다. 깃털 펜을 입술로 가볍게 깨물며 리페레인은 조금 고민했다. 마땅히 써야 할 말은 있지만, 이걸 썼을 때 과연 그녀의 오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눈치 빠르고 동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케이네스라면, 리페레인이 대신전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을 것이었다. 감출 필요는 없을까. 하지만 아마 두 살 어린 남동생 엘키네스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 알려줄까. 분명 나이에 맞지 않게 자신을 잘 따르는 - 올해로 열여덟이 될 동생은 누나의 결정에 격렬히 반대 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 뻔 한 그녀의 아버지도. “으응…역시, 케이 오빠밖에 이해 해 줄 사람이 없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은 다시 움직여 뒷말을 잇는다. 어차피 이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자신의 결정은 빼도 박도 못할 ‘기정 사실’이 되어 있을 테니까. 「…오빠는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일의 의식에서 공식적으로 난 ‘디 마르첼로 콘체르토’의 성을 버릴 거야. 아마 엘키도 아빠도 이 사실을 알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집에는 오빠도 있고 엘키도 있으니까, 내가 성을 버린다고 해도 별 지장은 없겠지. 아빠는 많이 서운해 하실 거고…엄마도 서운해 하시겠지만, 아마 엄마보다는 아빠가 훨씬 더 서운해 하실 것 같아. 일단 아빠한테도 따로 편지를 쓰긴 할 테지만, 오빠가 잘 얘기 해 줬으면 좋겠어. ‘너는 나의 아이지만, 너를 너로서 존재케 한 것은 지상에서의 네 부모이니라.’ 아빠도, 엄마도, 엘키도, 그리고 케이 오빠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이제 한 줄만 덧붙이면 되건만, 좀처럼 펜이 종이에 닿지 않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펜을 잉크병에 꽂고, 리페레인은 턱을 괴고 말끄러미 종이를 바라보았다. 성을 버린다는 결정은 10년 전부터 단 하루도 바뀐 적이 없는 결심이었다. 하지만, 역시 괴로웠다. “…당신을 따르는 길이 가시밭길 일지라도.” 비록 심장에 수없이 바늘이 꽂히는 고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택한 길이기에 오롯이 자신이 혼자 짊어지고 감내해야 하는 길. “ - 그 길 끝에 있을 당신의 낙원을 믿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에 놓는 것이라고 말하면 지독한 모순이지만, 그 외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이후에 택할 길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이 조금은 더 안전해 질 수 있을 거라는 진실만은. 실질적인 의미로도, 신앙의 의미로도.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을 테지만.” 깃털 펜을 다시 잡은 리페레인은 끝에 묻은 잉크의 양을 적절히 조절 하려 잉크병 목에 두 어 번 펜 끝을 문질러 내고는, 종이 위로 펜을 옮겼다. “내가 얻을 그 모든 것을 나를 지상에 존재케 한 부모와 형제에게 돌리겠나니.” 「…그러니까, 나대신 많이 웃고, 많이 행복해 져 줘. 언제까지나, 리페는 모두를 위해 기도할 테니까. - 오빠의 동생, 리페레인이.」 - 그 것으로 그들이 당신의 낙원에 도달하기를. ================================================================================== 시기로 따지자면 지금... 707년에서 약 2년 쯤 전의 이야기입니다. 기명사제의 의식을 앞두고(그것도 정말 코 앞에 두고) 가족에게 통보(....). 분명 사전에 알리면 대신전까지 쫓아왔을 게 뻔해서 그만 뒀습니다. 가족간의 사이는 상당히 좋습니다. 리페도 가족들에 대한 애정은 깊어요. 그래서 아마 의식을 결정하면서 '귀족으로서의 성'을 버린다는 사실이 괴로웠던 게 아니라 '가족이라는 증거로써의 성'을 버린다는 것이 괴로웠을지도. * 사이드 란에 업. 시간도 시간이고 해서 좀 센치한 기분으로 짤막하게 끄적인 과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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