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urvan][完]

[이벤트] 2007, 그 마지막 밤

ashu 2007. 12. 31. 00:16


 

 


  “에…그러니까….”

  모니터에 떠 있는 것은 하얀 공백. 깜박이는 커서 앞에는 길디 긴 본문. 의자에 몸을 기대고 머리는 언제나처럼 질끈 묶은 채 한 손에는 언제나의 원수이자 밥줄인 책, 입에는 애용하는 0.25mm의 까만색 펜을 물고 웅얼거리던 류하의 핸드폰이 책상 위에서 지잉 - 하고 울었다.

  “뭐야……?”

 

 

* 2007, 그 마지막 밤 *

 


  잘근잘근 씹어 잇자국이 플라스틱에 남아버린 펜을 책상 위에 탁, 내려놓고 류하는 반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이 빌어먹을 담당자, 이번에도 마감 일주일만 빨리 해 주세요, 이딴 얘기 하면 전화해서 그렇게 만만해 보이면 당신이 하든가! 라고 외쳐줘 버릴 테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핸드폰을 열고 비밀번호 네 자리를 꾹꾹 누른 류하는 문자를 확인하고는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이니?”

  앞부분의 중얼거림은 극히 작은 소리였지만 입술 모양만으로 짐작해 보건대 ‘이것들이 지금 누구 염장 질이니?’라고 한 것 같다.

  「류하야 지금 종각인데 사람 엄청 많다 너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잖아 빨랑 튀어나와 술이나 사」

  답장 버튼을 꾸욱, 마치 날파리를 손으로 눌러죽이듯 원념을 담아 눌러준 류하는 짤막하게 답장을 보냈다.

  「바퀴벌레 커플 사절. 이 몸은 바쁘니까 남친한테 사달라고 하세요.」

  “연말에도 일해야 하는 몸한테 무슨 술이야 술은.”

  일에는 방학이 따로 없다. 종강은 일찌감치 했지만 대학생인 그녀가 종강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회인 선배격의 담당자가 ‘류하씨, 이제 괜찮죠?’라며 근 한 시간 반을 카페에서 꼬드긴 것은 그녀가 싫어하다 못해 이를 득득 가는 이과 계열의 서적.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교양수업으로 영원히 바이바이라고 생각했던 단어들, 그것도 이 나라 말이 아닌 딴 나라말로 그 단어들과 피 눈물 나는 재회를 해야만 했던 류하는 작업 때문에 크리스마스이브의 솔로 파티도 반납, 이번 해 초에는 반드시 본가에 한 번 찾아가 보겠다던 다짐도 담당자가 ‘가능하면 1월 중순까지는 끝내주세요.’라고 했던 말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놈의 인센티브가 뭔지.

  “…아아, 몰라.”

  잠깐 쉴래, 라고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중얼거림을 툭, 허공에 내뱉은 류하는 들고 있던 책을 책상 한구석에 휙 집어던지고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위로 푹 엎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빼꼼이 고개를 들어 핸드폰 시계를 본다. ‘2007년 12월 31일 PM 11:33’ 포옥, 하고 한숨을 내쉰다.

  “이제 끽해야 30분이네.”

이걸로 다사다난했던 2007년도 종료. 정확히, 앞으로 27분 뒤면 2007년은 가고 새해가 찾아오겠지. 그러고 보니 어젯밤 꿈에서도 거하게 한 번 일을 쳤던 것 같았는데, ‘그 아가씨’는. 같이 지낼 사람들 앞으로 무사히 잘 지낼 수는 있을까나. 처음에는 그냥 꿈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그게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더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꿈속의 자신이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아주 가끔 리페레인이 어릴 적에 뛰어다니다가 넘어지거나 다쳤을 때의 여파가 미미하지만 자신에게도 끼쳤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꿈속의 여파가 현실에서도 미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더더욱 창백해지는 것이었다.

  “난 결코 요리를 못하는 편은 아닌데…….”

  자취생이란 건 좀 서글픈 거라서, 아무리 요리를 못하더라도 자취 반년이면 그럭저럭 먹을 만한 요리로 진화한다는 법칙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건 류하도 예외가 아니었다. 본가에 있을 때도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게 있고, 미각도 그럭저럭 정상인의 범주였고, 요리에도 흥미가 있었던 터라(꿈속 리페레인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만드는 족족 멋지게 실패하는 꿈을 꾸면 해보고 싶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럭저럭 평작 내지는 잘 만드는 편이었고, 자취하면서 이것저것 개발하긴 했지만 리페레인같이 기발하다 못해 ‘뭐?’라는 반응이 나오는 조합은 아예 생각을 하지 않아서일까. 먹은 사람이 복통을 호소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거나 어딘가로 맹질주 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가르칠 수 있다면 가르치고 싶다, 진짜.”

  하지만 ‘그 곳’은 자신의 경계 밖, 영역 밖. 자신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입단, 했었지.”

  침대에서 일어나 리모콘을 잡은 류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TV를 켰다. 12시가 가까워 오는 탓인지, 방송사마다 종각의 풍경을 비추며 연말 특집 방송들을 하고 있다. 카메라에서 비추는 종각은 정말이지 인산인해. 저기 가서 잘못하다간 밟혀 죽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을 하면서 꾹꾹, 아무렇게나 채널을 돌린다.

  현실의 이 류하는 혼자지만, 꿈속의 리페레인 스펜타는 혼자가 아니다.
  이렇게 혼자서 새해를 맞고, 일을 하다가 잠들면 - 그녀는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해를 맞고 있겠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자리에서.

  「예, 여기는 종각입니다. 2007년 마지막을 앞두고,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습니다. 가족, 연인, 동료 등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이번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려는 열기가 뜨거운데요…….」

  리포터 하나가 타종 행사를 앞두고 소란스런 종각 거리에서, 그 소란에 묻히지 않으려는 듯 한껏 큰 소리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가족인가.’ 괜스레 입술을 삐죽이며 한 쪽 무릎을 끌어안고 흘끔, 책상 위를 본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둔 책이 보인다.

  “…이게 무슨 궁상이람.”

  아아, 귀찮아, 라고 입으로는 중얼거리면서도 류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방 안에서 책과 씨름하며 일에 쩔어 보내는 건 전혀 달갑지 않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좋으니까, 저 소란 속에 섞여드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었다.

  「TV를 보고 계시는 여러분께도 이 열기가……」

  꾹, 전원 버튼을 눌러 TV를 끈 류하는 대충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가 깔끔하게 올려 묶으며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그런 게 전해질 리 없잖아, 직접 나가지 않는 한은. 핸드폰 시계를 열어보았다. 11시 43분. 아직 시간은 남아있다. 엎어지면 코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가까운 편이니까. 굳이 종각이 아니어도 지금 시간이라면 거리는 사람으로 넘쳐나겠지.

  “그걸로 충분해.”

 

  안녕히, 2007년의 외로운 밤.

 

================================================================================


사실 2007년 마지막 날을 혼자 보내는 건 저구요...&& 흑.

부모님은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강원도로 휘릭.(아버지가 강원도로 일하러 가시고 어머니는 오늘 아침에 자는 딸을 냅두고 가셨습니다orz)
오빠는 오늘도 야간 근무라 출근 총총.


... 아 어쩐지 눈물이-_-;;


* 새해 맞이 이벤트 글. 현실 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