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 01. 혼마루에는 사니와와 도검들이 산다
Posted 2016. 1. 28. 17:24일하기 싫으니 생각나는대로 끄적이는 여고생 사니와 역하렘 도검 드림 표방.
혼마루에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왔다. 창으로 새어드는 햇살에 레이카는 작게 뒤척이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겨울의 혼마루는 사니와로 파견되기 전에 살던 제 방에 비하면 추운 편이어서, 포근한 이불로 온몸을 돌돌 말다시피 한 채로 도롱이 벌레처럼 철저하게 방비를 해야 했다. 물론 잠들기 전엔 야겐이나 호리카와가 방에 작은 화로를 두고 확인해 주긴 했지만, 그 화로도 보통 늦은 새벽이면 꺼져 아침 무렵의 방은 서늘할 수 밖에 없었다.
멀쩡하게 살고 있던 여고생을 다른 차원 같은 곳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정부였지만, 그 정부에서 마련해 준 혼마루는 신기할 정도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좋게 말하면 아날로그 감성과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고도의 기술 문명에 익숙해 져 있는 사람이 살기에는 지독하게도 불편했다. 정부와 소통할 때 및 정기 보고차 이동할 때야 문명의 이기를 쓸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외의 부분에 있어 그 문명의 이기를 제공해 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런 것에 의지하지 말고 주어진 것으로 다른 사니와들과 교류하며 할 일이나 잘 하란 소리겠지. 혼마루에 온 지 3개월만에 그 사실을 깨달은 레이카는 일단 혼마루의 도검남사들과의 관계 유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정부는 필요 최소한의 지원만 해 줄 뿐, 그 이상의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우군이자 말 그대로 자신의 '검'인 이들과의 사이를 챙기는 게 더 중요했다.
"대장."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꼼질거리는 레이카의 머리맡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카는 못들은 척 뒤척였다. 다시 한 번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불 너머로 머리를 가볍게 짚는 손이 느껴졌다. 도톰한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그 손이 한 쪽 끝을 잡는게 느껴졌다. 레이카는 반사적으로 그 쪽으로 몸을 굴려 이불자락을 사수하려 했지만, 상대의 반응이 더 빨랐다. 한 쪽을 잡아 반대쪽으로 힘껏 당기는 기세에 레이카의 몸에 감겨있던 이불이 풀리며 반쯤 몸이 굴렀다. 눈꺼풀 위로 햇살이 직격하고, 이불 너머로 들려 흐릿하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에 닿았다.
"숙녀가 맨다리를 그렇게 보이면 안되잖아, 대장."
"... 이렇게 만든 건 야겐이잖아."
요 위에 누워 제 머리맡에서 이불을 들고 있는 야겐 토시로를 보며 레이카는 입술을 삐죽였다. 잠옷 대용으로 입고 있는 유카타 자락은 방금 전의 쓸데없는 저항 탓에 흐트러져 무릎 위까지 벌어져 있었다.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맨다리에 닿는 감각에 레이카는 작게 몸을 떨었다가, 야겐이 들고 있는 이불 자락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세베가 쫓아올텐데."
이불을 든 야겐이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레이카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고는 이 이상의 쓸데없는 저항은 포기하기로 했다. 이불 쪽으로 뻗은 손이 힘없이 내려가자 야겐은 다시 한 번 웃고는 제 손에 들고있던 이불을 잘 개어 방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밤새 타고 꺼진 화로를 들었다.
"불 갈아 올테니까 조금만 참아."
"응."
혼마루에 온 지 반 년째. 처음 왔을 때는 '여기를 달랑 둘(+한마리)이 쓰라고?'라고 할 정도로 쓸데없이 넓은 곳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더 넓힐 수 없을까 고민할 정도로 그녀의 '검'은 늘어있었다. 다음 번 정기 보고때에 혼마루 확장 신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카는 옷자락을 가다듬었다. 여전히 요 위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채였다.
야겐 토시로는 레이카가 혼마루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류한 남사였다. 레이카의 초기도였던 하치스카 코테츠는 사니와에게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었던 것에 비해, 야겐 토시로는 혼마루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 아침마다 레이카를 깨우러 오곤 했다. 레이카가 야겐에게 물어보니 동생들을 챙기던 습관이 남아서, 라고 했고 그 말 대로 야겐이 레이카를 챙기는 건 오빠가 철없는 여동생을 챙기는 것 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대장, 문 좀 열어줄 수 있어?"
문 너머에서 들리는 야겐의 목소리에 레이카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야겐은 방으로 들어와 화로를 내려놓았다. 그제야 레이카는 요에서 일어나 화로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야겐이 웃으며 한 쪽에 걸어놓은 겉옷을 레이카의 어깨에 걸쳐주곤, 뒤쪽에 앉아 레이카의 어깨에 가볍게 턱을 얹었다.
"좀 더 자도 돼?"
"기대서 자면."
"하세베가 쫓아 올 거라며."
"저 위에 누워 있으면 하세베가 쫓아와서 덮칠텐데."
"농담도."
귓가에서 들리는 야겐의 웃음섞인 낮은 목소리에 레이카는 소리없이 웃었다. 야겐은 여전히 레이카의 뒤에 앉아 한 손으로는 레이카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미츠타다가 말리곤 있지만."
"아침은 그 둘이야?"
"그래야지 내가 대장을 안전하게 깨우러 올 거 아냐."
"안전하게?"
"응, 안전하게."
그렇게 말하며 야겐은 다시 웃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드러낸 뒤, 귓가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
"자, 이제 잠 좀 깼지? 정말로 하세베가 쫓아오기 전에 준비하고 나와."
겨울의 혼마루 정원에 눈이 쌓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올 겨울 들어 세번째. 그러나 반년 전에 혼마루에 온 레이카가 그걸 알 리 없었다. 미츠타다와 오오쿠리카라, 그리고 미츠타다가 반쯤 강제로(?) 잡아둔 하세베가 준비한 아침을 먹고 난 다음 사니와를 지킬 그 날의 남사들 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각자 원정이니 임무를 위해 출진했다. 그날 혼마루에 남는 비번은 카센 카네사다와 소우자 사몬지, 고코타이와 마에다 토시로였다.
카센이 사니와의 방을 찾았을 때, 정원이 보이는 방 앞 대청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레이카가 보였다. 까만 머리카락이 어깨에 걸쳐진 붉은 겉옷위에 흘러 내려 앉아 있었다. 옷자락 아래로 보이는 맨발이 시려워 보일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눈이 쌓여 새하얀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카센은 한참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 갔다.
"동백이 피어 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깜짝이야."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는 레이카의 뺨에 손을 가져간 카센은 손에 느껴지는 서늘함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추운 건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눈은 오랜만에 보는 거라서."
"며칠 전에도 이리 쌓였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때는 정말 어린 아이마냥 젖기 쉬운 신발을 신고 단도들과 같이 눈밭에 발자국을 남겼었지.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지금같은 붉은 겉옷이었다. 내번 도중 잠깐 돌아왔을 때, 멀리서 본 레이카는 하얀 눈밭에 나풀거리는 동백꽃잎같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센은 뺨에 닿아있는 손을 조금 움직였다. 머리카락에 가려지지 않은 귓가가 붉었다.
"카센 손은 따뜻하네."
"내가 따뜻한 게 아니고 네가 차가운 것이지."
평소엔 네가 더 따뜻하니까. 귓가를 만지던 카센의 손이 귀 뒤로, 그리고 목깃 아래에 조금 드러난 목가에 닿았다. 카센의 손길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레이카의 시선은 여전히 포슬포슬 눈이 내리는 정원과, 정원의 자그마한 연못에 쉴새없이 떨어져 사라지는 눈을 좇고 있었다. 카센이 레이카 쪽으로 조금 몸을 기울였다. 오전에 출정 나가기 전에 카슈 키요미츠가 레이카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챙겨주었던 게 기억나,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잘 정돈된 머리카락 끝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갔다. 달지만 결코 짙지 않은 향이 스쳤다. 아마 카슈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오늘처럼 눈이 쌓인 날에 제가 그토록 마음에 품어 마지않는 이에게 가장 어울리는 향은 이 외엔 없을테니까. 희게 드러난 목덜미 가까이까지 고개를 숙였던 카센은 입술을 묻는 대신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레이카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간지러워, 라며. 카센의 손이 대청을 짚고 있는 레이카의 손 위에 겹쳐졌다. 그리고 그 차가워 진 손을 감싸듯, 카센의 손가락이 레이카의 손가락을 얽었다. 반쯤 제 품에 기대듯 앉아있게 한 채, 카센의 다른 손이 드러난 목덜미에서 어깨 근처를 맴돌았다. 레이카는 카센에게 가볍게 기대어 앉은 채, 딱히 그를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눈밭 위로 동백꽃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지게 하면 좋으련만.
카센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레이카의 목가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맴도는 많은 것을 담아 가볍게 이를 세웠다.
겐지의 검이 홀로 앉아있는 밤의 혼마루는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정좌하고 있는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굳게 닫힌 눈꺼풀은 열릴것 같지 않아보였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과, 그의 앞에 놓인 '본체'.
그리고 맞은 편에 앉아있는 소녀.
달빛만이 스며드는 공간에서 그것들만이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히게키리."
정적을 깨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멈추어 있던 겐지의 검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며 히게키리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히게키리는 눈을 들어 제 앞에 앉아있는 이 시대의 그의 '주인'을 보았다. 형제가 나란히 겐지 이외의 누군가를 다시 '주인'으로 갖게 될 줄은 몰랐다. 호박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그의 앞에 앉아있는 소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려다 곧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대신 천천히 몸을 숙이며, 그와 자신의 사이에 고요히 놓여있는 그의 '본체'로 손을 뻗었다. 히게키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그 동작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그가 한참 누군가를 '베던' 때엔, 단 한 번도 여인의 손에 쥐어져 본 적이 없었다. 보검으로 겐지의 주인들에게 중히 여겨졌을 뿐이었다. 틀어올리지 않은 검은 머리가 어깨를 스쳐 흘러내렸다. 언젠가 이 혼마루에서 마주쳤던 다른 도검 - 카센 카네사다라고 했다 - 은 눈 앞의 주인을 보고 겨울의 동백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 히게키리는 그 말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동감했다. 붉은 꽃잎같은 옷자락 아래로 보이는 손이며 손목은 희고 작았다. 곧게 뻗은 손가락과, 흘러내린 머리카락 틈과 목깃 아래로 보일락말락한 목덜미도. 소녀의 손이 본체의 검집을 천천히 쓸었다. 그 손을 말없이 바라보며, 히게키리는 들리지 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닿고 있는 것은 곧 그 자신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자신은 아니었다. 츠쿠모가미라는 것은 번거롭고 귀찮은 것이었다. 저 손이 자신에게 닿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저 손길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금방이라도 깨질듯 아슬한 공기를 베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검집에서 조금씩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바라보며, 그 잘 벼려진 칼날로 이 거리를 그대로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밀려드는 것을, 히게키리는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눈밭에 흐드러지게 흩어진 붉은 꽃잎만큼 도착적으로 아름다운 것도 없지. 부서져 버려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없지만, 깨어져버린 그 순간이 그 어떤 때 보다도 아름다운 것도 있는 거니까.
카센 카네사다의 말이 옳았다. 눈 앞의 붉은 꽃은, 아마도 부서져 흐트러진다 하더라도 지독하게 아름다울 것이었다. 히게키리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손 끝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소녀의 손이 검신을 천천히 쓸었다. 그대로 그 손을 잡아 채어도 되겠지만 - 히게키리는 천천히 제 손에서 힘을 빼었다. 아직 안 되었다. 모처럼 얻은 새 주인이었고, 부숴버리기엔 아직 너무도 일렀다. 만개할 때까지 지켜보다가 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 아아,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다지 오래 참을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가까이,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누구보다도 가까이 곁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자신은 확실히 '검'이 되고 말 것이었다. 그 때도 그랬듯,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본래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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